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다수론(30만 이상) ===== 《[[구당서]]》에 따르면 '''이세적'''의 요동도행군 60,000명에[*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0,000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게 하였다.' 라는 삼국사기의 서술을 고려하자면 60,000명의 군사에 이민족(돌궐 기병 등) 군사들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6만 + a) ] '''장량'''의 평양도행군 43,000명[* 이는 644년 11월 고구려 정벌을 처음 편성할 당시의 규모이다. 이후 평양도행군에 기존 편성 목록에 없었던 행군총관 고신감과 구효충 등이 추가됨을 고려한다면 수군이 70,000명으로 기록된 신당서와 맞아 떨어진다.]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고구려 원정군의 규모가 육군 10만에 수군 7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당태종의 친정군과 건안성을 공격한 장검의 이민족 부대를 고려하지 않고 선봉대로 볼 수 있는 요동/평양도행군의 병력 수만 적혀있다. 당 태종의 친정군에는 요동도행군 대총관이자 당시 병부상서였던 이세적과 동급, 그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장손무기와 [[유홍기(당나라)|유홍기]]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선봉대인 요동도행군과 황제의 친정군은 규모 면에서 큰 차이가 났을 가능성이 크므로 태종의 친정군의 규모는 요동도행군의 그것보다 훨씬 큰 십수만~수십만 대의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멀리 갈 것도 없이 여요전쟁의 경우만 보아도 요성종이 친정을 한 2차 전쟁에서 요나라가 동원한 병력은 40만이었지만, 1, 3차 전쟁때의 동원 병력은 많아봐야 10만 정도로 확인되고 있다.] 이 전쟁에 동원된 [[당나라군|당군]]의 편제나 진용은 당나라의 대외 원정을 통틀어 봐도 최고의 호화진영이자 최대 편제였다. '''황제 이세민이 직접 친정군인 6군을 이끌었으며, 당나라의 6부 상서 중 무려 4개 상서[* 병부상서 이세적, 예부상서 이도종 , 이부상서 양사도, 형부상서 장량]가 참전하였고, 당시 생존중이던 [[능연각 공신]] 11명 중 5명이 전쟁에 참전하였음이 확인된다. 이들 외에도 종3품~정3품 이상의 [[고관대작]]들이 다수 참전한 것 역시 확인된다.'''[* 이민수, 「645년 唐의 高句麗 원정군 규모 推算」, 한국상고사학보 100, 2018]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급로 유지를 위해서 경비 병력들이 대량으로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당나라 장수들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행군 도중 합류한 잔여부대와 돌궐, 거란, 해 등 여러 이민족들이 합세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총 병력으로 볼 수 있는 30만 이상 규모의 지상군을 당이 동원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훗날 발해의 무왕이 당나라를 침공하기 전,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고구려도 '''30만'''의 강병(强兵)으로 당에 맞서다가 패배하였는데 발해의 군사력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므로 승산이 없습니다' 라고 발언하며 당나라 공격을 만류한 바가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동원 가능 병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동원된 당군의 총 규모를 30만 이상이라고 잡아도 당군의 주요 점령지였던 요동성이나 [[개모성]], 그리고 당군의 군량 수송로에도 다수의 군사들이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며 당시 [[주필산 전투]]나 [[안시성 전투]]가 벌어질 즈음에도 신성과 건안성에 대규모의 당군이 투입되어 전투가 벌어졌음을 고려하면[* 위정은 당 태종의 6군 소속으로 당 태종의 친정군이 요하를 도하한 5월 이후 개모성에 배치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신성#s-5|신성]] 전투에서 [[고구려#s-7|고구려군]]과 [[당나라군|당군]]의 북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필산 전투 당시 당 태종이 고구려 대군을 부담스럽게 여긴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수나라 때 동원된 약 114만 명 규모에 절반은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분명하게 크다. 더욱이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주변 이민족들이나 국가들을 통제 복속시킨 것은 그만큼의 국경 안정을 추구하여 병력을 최대한 집중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특히 [[토번]]이나 [[설연타]]에게 경고했을 때의 100만 대군의 이야기는 결코 허황된 규모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면 최소 언급된 규모의 1/2은 되어야 규모를 뻥튀기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동원 규모이기 때문이다.[* 책부원구에 따르면 645년 토번 사신이 당나라를 방문했을 때 1차 여당전쟁을 언급하면서 '[[태종(당)|황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정벌하였다' 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 [[수나라]] 역시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주변국을 복속하여 최대한 통제한 다음에야 그만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다르지 않다. 고구려는 고구려 영토 내에서만 야전에 한번에 동원 가능한 병력이 십수만 규모에 이르렀다. 실제로 주필산 전투 때만해도 15만 명이 야전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패해 대치 상태에 있었던 점이나 그외의 수차례의 수만명 규모의 병력 차출은 야전에서 고구려도 십만 이상의 병력 동원이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적보다 우세하거나 대등하면 공세를 취하고 적보다 열세일 경우에는 방어를 취하는건 당시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군사학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